며칠간의 충돌 끝에 5월21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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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신선한 댓글 0건 | 조회 4회 작성일 25-05-19 05:11본문
마약전문변호사 앞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맞춰 집단 발포를 감행했다. 이날은 5·18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한 저항자로 나서게 됐다. 결국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무장했고 계엄군은 같은 날 시내에서 철수하며 도시는 일시적으로 시민군의 통제 속에 놓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은 중앙 언론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거나 왜곡됐고 정부는 이를 '폭도들의 반란'이라 주장했다. 고립된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폭력에 휘말렸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채 도청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은 거의 전멸했고 광주는 다시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공식 사망자 수는 163명이지만 당시 실종자와 부상자,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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